Der Apple-Monarch
Steve Jobs ist ein schwieriger Mensch. Er hasst Kritik, ist nachtragend und launisch. Doch ohne seine Visionen würde es Apple heute nicht mehr geben
von Thomas Heuzeroth
이 사나이는 사실 누구라도 정나미가 떨어지게 할 수 있는 성깔 있는 사나이다. 그는 오만하고 이기적이며, 극단을 달리는 데다가, 으스댐도 장난 아니다. 게다가 광적이고, 권력에도 굶주려 있으며, 참을성도 없다. 과대망상증도 있음은 물론이다. 이런 사내가 바로 스티븐 폴 잡스다. 애플 CEO, 스티브는 언제나 옳다. 스티브이니까. 그리고 "우리가 음악 사업에 혁명을 일으켰습니다."라는 말을 증명하는 데에도 잡스는 직설적이었다.
잡스는 누구보다도 그 점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의 아이디어를 자찬하였다. 마치 록스타처럼,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심포니홀을, 런던에서는 Billingsgate-Fischmarkt를 빌렸었다. 내일은 다시 우드스톡이다. 10시가 되면 그는 다시금 샌프란시스코의 개발자 앞에 나서서, 청바지와 검은 스웨터 차림으로 제품을 슬그머니 발표할 것이다. 이어지는 박수는 말할 것도 없고.
"타임-매거진"은 잡스의 이런 모습을 콜로세움 안의 로마 제국 황제에 비유한 적이 있다. "머큐리 뉴스"는 다만, "State of the Mac Adresses"이라고만 표현했다. 애플-시민들에게는 정말 최고의 순간이다.
스티브 쇼에서 정말 드라마틱한 순간은 이런 기조 연설 훨썬 이전부터 일어난다. 애플만큼 루머 사이트들을 잘 요리하는, 잘 이해하는 회사가 과연 있을까? 애플 사용자들 자신도 "AppleInsider"나, "MacRumors", "MacNN", "Thinksecret", "MacMinute" 등의 사이트에서 새소식 없나 두리번 거린다.
그런 까닭은 무엇보다도 스티브 잡스가 전혀 사교적이지 않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언론은 언론대로 그때문에 고생한다. 인터뷰는 10분 이상 허용이 안 되고, 일 년은 미리 예약을 받아 두어야 한다. 거대 언론사들도 마찬가지로 고생이다. 그와 인터뷰를 성사시킨 것 자체가 행운이다. 주간지인 "Die Zeit"의 한 저널리스트는 실제로 인터뷰에 들어가기 3 분 전에서야 허락을 받았고, 그렇게 해서도 "엉뚱한 질문"과 "메스껍도록 회의적인 태도"에 사과를 해야 했다. ZDF는 고가의 조명 시설과 카메라를 써 보지도 못한 채 치워야 했다. 잡스께서 인터뷰 할 마음이 싹 가셨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은 생방송에서도 일어났다. "짐이 곧 국가다."는 루이 14세만이 아니다. 잡스도 그러하다.
여하간 잡스는 극단적으로 성질을 잘 낸다. 모나 심슨과 남매라도 되잖을까. 소설, "A Regular Guy"의 저자는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의 오빠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는 화장실 청소마저도 너무나 열성적이었다." 덕택에 남매는 관계가 차가워진다.
스티브 잡스는 언제나 뚜렷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이제 49살이 된 그는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의 양부모 밑에서 자라났다. 오레곤 주 Reed 대학에서 물리학과 문학을 공부한 잡스는 길들여지기를 거부하였다. 그는 대학 안에서 맨발로 걸어다니면서, 머리는 장발로 하고, 약물도 경험한다.
고등 학교에 다닐 당시 그는 이미 "Wire-Heads"라는 비공인-맹렬 컴퓨터 그룹에 들어가 있었다. 졸업 후 그는 개인적으로 윌리암 휼렛(William R. Hewlett)에게 휴일 일자리를 지원하였다. 그 후에는 아타리에서 비디오게임 디자이너 일을 하기도 하였다.
불교도 여기에 추가된다. 1974년 잡스는 인도에 몇 달 동안 체류한다. 인도에서 한 구루가 그를 채식주의자로 탈바꿈시키게 된다. 돌아온 이후, 그는 스티브 워즈니악(다섯 살이 더 많다)과 교제하고 학업도 중단한다.
둘은 1976년 애플 컴퓨터를 창립한다. 이름부터가 이미 즉흥적이었다. 잡스는 아타리의 전임-고용주에게 전화번호부를 집어 던졌기 때문에, 부모 집 차고에서 회사를 차릴 수 밖에 없었다. 봅딜런 노래를 기타로 연주하던 당시 잡스는 애플 I 프로토타입을 임신중인 누이 Patty에게 집안 마루에서 처음으로 팔았다. 동네 회사에서는 25 대를 주문하였고, 잡스는 제품 판매를 위해 폴크스바겐 버스를 팔아치워야 했다.
하지만 진짜 히트 상품은 이듬 해에 나온 애플 II였다. 키보드와 합체였던 이 컴퓨터는 대량 판매를 이룩했다. 스티브 잡스의 행보도 빨라졌다. "23 살에는 백만 장자가 되고, 24 살에는 천만 장자가, 25 살에는 억만 장자가 됐습니다. 하지만 돈 벌려고 그런 것은 아니니까 그런 게 중요하진 않죠." 25살에 그는 처음으로 포브스 지가 선정한 미국 부자 목록에 들어간다. 그것도 최연소 백만 장자로서 말이다.
1980년, 애플은 주식 시장에 상장된다. 그런데 애플 III는 전임작의 성공을 이어갈 수 없었다. 당시 이미 잡스는 내부에서 따로 팀을 꾸려서 매킨토시를 개발중이었다. 잡스는 애플 CEO로서 당시 펩시콜라 사장이었던 존 스컬리를 영입한다.
그러자 애플 내의 권력 투쟁도 강도를 더해갔다. 스컬리가 그 장본인이였고, 잡스는 사업에 대해 예민해저만 갔다. 심지어 잡스 사무실이 바깥의 외진 곳으로 옮겨지기도 했었다. 그는 이 곳을 "시베리아"라 불렀다. 1985년 잡스는 애플에서 나와 NeXT를 따로 창립한다. 하지만 넥스트는 성공을 이루지 못하다가, 10여 년 후에 다시 애플로 병합된다.
행운아 잡스는 영화 업계에도 발을 들여 놓는다. 1986년, 그는 스타워즈의 제작자, 조지 루카스로부터 천만 달러에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인수한다. 사장이자 CEO로서 잡스는 디즈니와 컴퓨터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 "토이스토리 2", "벅스라이프",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의 생산에 대한 계약을 맺는다. 이들 영화로 픽사는 2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다.
픽사는 잡스를 재벌로 만들어 주었고, 세상도 그의 재능을 다시금 기억해 주었다. 바로 창조성을 지닌 기술 개발자로서 말이다. 하지만 픽사의 CEO는 디즈니에 대해 거의 존경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디즈니 CEO, 마이클 아이즈너도 잡스만큼이나 디즈니에 피곤해 한 점은 마찬가지였다.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런데 2006년부터는 픽사가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야 한다.
애플은 1997년, 자신의 창립자를 다시 맞이한다. 타이밍도 알맞았다. 당시 애플은 깊은 위기에 휩싸여 있었으며 일곱 분기 연속 적자 상태였다. 시장 점유율은 거의 3%로 떨어졌었다. 잡스는 임시(inerim)이라는 의미로 자신을 "iCEO"라 불렀다. 2000년이 되어서야 그는 정식 CEO에 오른다. 연봉을 일 달러만 받던 그를 위해 이사회에서는 그에게 Gulfstream-Jet기를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지난 해에는 스톡 옵션까지 더해져서 그의 소득은 7500만 달러가 되었다.
잡스는 회사를 구해냈다. 우선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와 협상을 해서, 빌 게이츠가 애플에 1억 5천만 달러를 투자하도록 이끌었다. 여기에 대해 실망한 애플 팬들이 많았다. 이들에게 있어 게이츠의 투자는 적과의 동침이었다. 그리고 잡스는 레몬색과 딸기색 등의 다양한 색상을 갖춘 아이맥을 선보였다. 당시 잡스의 말이다. "컴퓨터 구입에 있어 제일 중요한 질문은 바로 미래입니다. 어떤 색상이 요새 잘팔립니까?"
90년대 말이 되자 애플은 다시 흑자로 돌아서게 된다. 애플의 아이북과 파워맥 G3도 제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큐브와 반구형 아이맥의 실패도 빠르게 극복하였다.
2000년 1월에 이미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향후 10년 안에, 애플은 제일 성공적인 십대 기업 이라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애플 직워들은 그러한 비전에 열광한다. 그들의 보스는 두려움의 대상인 동시에 경외의 대상이다. 잡스의 카리스마와 한 성질은 모두를 확신시킨다. 전기 작가인 알란 도이치만(Alan Deutschman)은 이렇게 표현했다. "한 번 잡스를 만나서, 잡스의 말을 들어 보면, 가끔 잡스 안에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됩니다."
잡스의 목표는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LSD 복용에 대한 질문에서는 면접 수험생처럼 자제심을 잃던 그는 지난 3년간 아이포드 뮤직 플레이를 크게 히트시켰다. 비판가들은 399 달러의 가격이 무슨 히트작이 되겠냐 비웃었지만, 그동안 애플은 3백만 대 이상의 아이포드를 판매하였고, 올해 첫 세달만 해도 80만 대를 팔았다. 지난 해 동기에 비해서 이윤도 세 배로 뛰어 올랐다. 그런데 이번에 애플은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스티브 잡스가 처음으로 컴퓨터보다 아이포드를 더 많이 판매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애플은 자신을 그동안 불법 인터넷 다운로드로 허덕이던 음악 사업의 구세주로 자찬하였다. 미국의 아이튠즈 뮤직 스토어만 해도, 곡당 99 센트의 가격으로 한 주일에 300만 달러를 벌어들인다. 6월 중순에 시작한 아이튠즈 유럽도 시작한 지 일 주일만에 80만 곡의 판매를 이룩하였다.
비디오-아이포드가 언제쯤 나올 지를 질문한 저널리스트가 한 명 있었다. 스티브 잡스의 답변은 날카로웠다. "아이포드가 토스트를 구울 수 있을 때겠죠. Es geht um Musik, Trottel."
아.. 너무 사랑스러운 스티브 잡스. The man of amazingness and dreams!
-ㅌ-
엇.. 내가 좋아라 하는 스티브 잡스.. ㅠ,.ㅠ
디지털음악이 몸에 해를 좀 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