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한 분야에서 오래 일하다보면, 그 분야의 깊이를 알게 되고, 매력도 느끼게 된다. (물론 오래 일할수록 정이 떨어지는 분야도 있겠지만, 그건 적성의 문제라고 해두고)
하지만 한 분야를 처음 접근할때는 개미집의 입구 속을 바라보는 것과도 같아서 개미집의 작은 통로를 바라보거나 입구가 갈라지는 작은 방 안을 쳐다보는 것 정도로는 그 분야에 대한 이해도, 깊이도 알 수 없다. 특히, 이러한 제한적 시야는 자신이 심리적으로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경쟁구도에 있는 분야를 바라볼때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를테면 (디자인산업과 크게 상관없는 분야의)경영자가 디자인이라는 영역을 바라보거나, 개발의 영역에서 영업의 영역을 바라보는 것 등 서로 다른 분야를 바라볼 때 여러 감정적 + 비합리적 시야를 통하여 보게 된다.
이는 앞서 말한 것 처럼 자신이 여태까지 탐험한 개미집은 이렇게 큰데(오래 탐험할 수록 그 커다란 크기를 생생히 알게 되므로) 상대방의 개미집을 들여다 보면 아직 입구 속의 작은 방 정도 밖에 안보이기 때문에 그 속의 깊이를 어림 짐작하기 때문이다.
나도 처음에 과학의 입장에서 예술(꼬집어 말하자면 미술이나 디자인)쪽에 근접한 영역을 바라볼때 그 학문적 깊이의 얕음(?)에 상대적 우월감(?)까지 느꼈던 적도 있고 - 결국 이는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잘못된 각도였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 디자인이라는 분야를 공부하고 체험해보면서 내가 처음 가졌던 편견이 너무나도 그릇되었다라는 것을 구구절절 깨닫게 되었다.
타이포그라피라는 한 영역에서만 해도 그 많은 고민의 깊이와 황홀한 세계가 펼쳐지는 것을 맛보게 되었을 때, 동시에 스스로에게 느꼈던 부끄러움도 이루어 말할 수 없었다.
경영도 마찬가지였다. 과학(물리학, 생물학, 진화심리, 인지과학 등), 개발, 그리고 디자인으로 뻗어나간 나의 영역이라는 것이 경영에 닿게 되었을 때, 영업과 마케팅, 그리고 PR 등에 갖는 혐오감은 이루어말할 수 없었다. 금융 같은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러나 회사 생활을 하면서 각 영역의 고유성과 필요성, 그리고 그 깊이를 차츰 차츰 경험하게 되면서 호기심이 생겼다. 때 마침 수 많은 기획과 프리젠테이션 기회를 거치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었는데, 이러한 경험 속에서 내가 그동안 어림집았던 개미집의 방대함을 다시금 체험하게 되었고, 이를 통하여 내가 아는 개미집이 하나 더 늘어나게 되었다.
지금은 공대 출신으로서 디자인의 영역을 거쳐, 경영대 조직의 회장직을 맡게 되기 까지 '서로 까대고 무시하면서도 약간의 경외감을 가지고 있는' 영역에서 각자의 장단에 맞추며 살아보았던 것 같다.
사실 서로 알고 있기도 하다. 감정적으로 자극받기 전까지는 서로의 고유성에 대하여 다들 인정하면서도, 그래도 심리적으로 자신의 개미집을 옹호하고 가장 좋은 집이며 가장 커다랗다고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 모두에게 있다. 또한, 결국 언젠가는 자신의 중심을 선택하여야 하며, 그러한 선택 속에서 자신의 힘을 키워나갈 수 있기도 하다.
나는 르네상스맨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각 집을 충분히 탐험하지 못한 채로 다른 집에서 놀게 되면 트위너(tweener; 농구에서 각 영역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약간씩은 뛰어난데 뭔가 하나를 믿고 맞기기엔 약간씩 부족한 선수)가 되어버리는 수가 있다.
이것이 내가 주장하는 multi-specialist와 (피상적)generalist의 차이인것 같다. 다치바나 다카시 교수의 special generalist와 같은 개념이다. 결국 한 분야 한 분야를 깊이 탐험하고 나서 다른 분야를 탐험해야 그 풍부한 연결고리와 시기에 따른 강약/비중의 조절에 대한 감이 오는 것 같다.
결국 모두 중요하지만, 시기에 따라서, 자원에 따라서,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전략을 달리해야 하기에 여러 개미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둔다면 큰 일을 할 수 있다.
자칫 잘못하여 한쪽의 집의 시각에서만 과도하게 주장하다보면 균형을 잃고 넘어질 수 있다. 오히려 그렇게 성공하는 경우는 운이 더욱 크게 - 성공 자체가 운의 비중이 높기도 하지만 - 작용한 것이므로 그것을 통하여 어떠한 배움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매번 생각을 정리할때 큰 힘이 되어주는 선배님들, 친구들, 후배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